말씀 찬양 CCM <기도의 의의> 기도 찬양

영상 소개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을 부르짖고 그로부터 감동받는 방법

기도가 많을수록 더욱 감동받고

깨우침을 얻으리

의지도 더 강해지리

이러한 자들은 속히 온전케 되리

기도하지 않는 자는 영이 없는 죽은 자

그로부터 감동받지 못하며

그의 사역 못 따르리

기도하지 않는 자는

정상적인 영적 삶을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며

그에게 인정받지 못하리

기도가 많을수록 더욱 감동받고

깨우침을 얻으리

의지도 더 강해지리

이러한 자들은 속히 온전케 되리

속히 온전케 되리

속히 온전케 되리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 관련 영상:

말씀 찬양 CCM 2020 <사람을 최대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홍수 후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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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성경 참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관련된 하나님 말씀:

『진리는 인간 세상에서 온 것이지만, 인간 세상의 진리는 그리스도가 전한 것이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말씀이 육신 되었도다’, 하나님은 말세에 이 사역(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사역)을 이룰 것인데, 이는 전체 경륜의 마지막 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이 땅에 와서 그의 말씀을 다 육신으로 나타낼 것이다.』―<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 중에서

『이번에 온 하나님은 영체가 아닌 아주 평범한 몸으로 사역한다. 그 몸은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한 몸이며, 또한 하나님이 다시 육신을 입고 돌아온 몸이고, 아주 평범한 육신이다. 너는 그에게서 남다른 점을 찾을 수 없으나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 보잘것없는 육신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진리의 말씀의 화신이고, 하나님이 하는 말세 사역의 담당자이며, 또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나타내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존재다. 너는 하늘의 하나님이 몹시 보고 싶지 않았더냐? 너는 하늘의 하나님을 몹시 알고 싶지 않았더냐? 너는 인류의 종착지를 몹시 궁금해하지 않았더냐? 그는 지금껏 아무도 알려 주지 못했던 이 모든 비밀을 너에게 알려 줄 것이고, 또한 네가 깨닫지 못한 진리도 알려 줄 것이다. 그는 너를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대문이자 너를 새 시대로 이끄는 인도자다. 이런 평범한 육신에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의 행사는 네가 분명하게 측량할 수 없지만, 그가 행하는 사역의 모든 목표를 통해 너는 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육신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말세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너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불꽃 같은 두 눈을 볼 수 없으며, 그의 철장(鐵杖)의 다스림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너는 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있음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의 지혜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의 정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말세 사역을 통해 땅에서 사람들에게 하늘의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가 다시 육신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

… 너희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이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육신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생존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 모든 복은 이 평범한 사람으로 인해 얻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만국이 모두 이 평범한 사람에게 경배하고,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가 가져온 진리와 생명과 길이 온 인류를 구원하였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누그러뜨렸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소통시키고, 또 그가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한 사람이 네가 믿고 앙모할 만한 가치가 없단 말이냐? 이런 평범한 육신이 그리스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단 말이냐? 이런 평범한 사람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발현이 될 수 없단 말이냐? 사람에게 재난을 면케 해 준 이러한 사람이 너희가 사랑하고 붙들 만한 가치가 없단 말이냐? 만약 너희가 그가 선포한 진리를 저버리고 또 그가 너희들 가운데에 거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너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는 아느냐?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매우 큰 일을 하였다는 것을> 중에서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서 조용히 숨어 계시는 그 평범한 사람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새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하지도, 자신이 온 이유를 확실히 말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자신의 계획과 단계에 따라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할 뿐이었다. 그의 말씀은 갈수록 잦아졌다. 위로와 충고, 격려, 일깨움, 경고에서 책망과 징계에 이르기까지,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에서 격하고 위엄 있는 말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갑절로 긍휼을 느낄 수 있었고 또한 두려움에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을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영을 찔러 아프게 했으며,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

우리는 어느새 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이끌려 하나님 사역의 절차 속으로 한 단계씩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채찍질, 그리고 죽음의 시험을 겪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롭고 위엄 있는 성품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누렸으며,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과 지혜를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절실한 마음도 보았다. 이 평범한 사람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며, 또한 사람의 본성과 본질도 알았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말씀은 우리를 ‘죽게’ 하는 동시에 ‘부활’시켰고, 우리를 위로하는 동시에 가책과 죄책감을 배로 느끼게 했으며,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안겨 주기도 했다. 우리는 때로 그의 손안에 있는 어린양마냥 그의 뜻대로 처분되었고, 때로는 그의 눈동자처럼 그의 사랑을 받았으며, 또 때로는 그의 원수가 된 것처럼 그의 눈앞에서 그의 분노에 잿더미로 변했다. 우리는 그가 구원하는 인류이다. 그의 눈에 우리는 구더기와 다름이 없지만, 우리는 또 그가 주야장천으로 찾는 길 잃은 양이었다. 그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미워하시며, 우리를 들어 세우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깨우치셨다. 또 그는 우리를 징계하거나 책망하시고, 심지어 우리를 저주하기도 하셨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걱정하고 돌보고 지켜 주셨으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이고 모든 대가를 쏟아부으셨다. 우리는 그 작고 평범한 육신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종착지도 보게 되었다. …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시며 여러 방식과 위치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훈계하시고, 마음의 소리를 전하셨다. 생명력을 가진 그의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도를 주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끌리기 시작했고, 그 말씀의 어조와 말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무의식적으로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심혈을 쏟아부으셨고, 우리 때문에 침식을 잊으셨으며, 우리 때문에 우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하셨다. 또한 그는 우리를 위해 병으로 신음하시고, 우리의 종착지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굴욕을 견디셨으며, 또 우리의 무감각과 패역 때문에 마음에서 피와 눈물을 흘리셨다. 이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평범한 사람에게 없는 것이자 패괴된 사람은 절대 갖출 수도, 이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에게 없는 관용과 인내심을 지니고 계시며, 그의 사랑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 말고는 어떤 이도 우리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 어떤 이도 우리의 본성과 본질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지 못하며, 어떤 이도 인류의 패역과 패괴를 심판하지 못하고, 어떤 이도 하늘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거나 사역하지 못했다. 또한, 그 말고는 어떤 이도 하나님의 권병과 지혜와 존엄을 갖추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은 그에게서 남김없이 발현되었다. 그 말고는 어떤 이도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 주거나 빛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그 말고는 어떤 이도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공개하지 않은 비밀을 밝히지 못했으며, 그 말고는 어떤 이도 우리를 사탄의 속박과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며,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당부,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는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기원을 열었고,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사역을 가져오셨으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미망 속에서 보내던 우리의 삶을 끝내셨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분명히 보게 하셨으며, 우리를 정복했고, 우리의 마음을 얻으셨다.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속에는 지각이 생겼고, 우리의 영도 소생한 듯했다. ‘이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 우리들 가운데서 살면서 오랫동안 우리에게 버림받았던 사람이 바로 우리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예수가 아닌가? 이분! 바로 이분이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다! 이분이 바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시다! 이분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광명을 보게 하셨으며, 우리의 마음이 더는 방랑하지 않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와 하나님과 마주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다> 중에서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시대를 열고, 말씀으로 사역의 방식을 바꾸며, 말씀으로 전체 시대의 사역을 행한다. 이것이 말씀 시대에 하나님이 사역하는 원칙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각기 다른 위치에서 말씀함으로써 사람에게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진정으로 보게 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기묘함을 보게 한다. 이렇게 사역하는 것은 사람을 정복하고 온전케 하며 도태시키기 위한 목적을 더 잘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 시대에 말씀으로 사역하는 진정한 함의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알고, 사람의 본질을 알며, 사람이 진입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말씀 시대에 행하려는 모든 사역을 이루는 한편, 사람을 드러내고 도태시키고 사람에게 시련을 준다. 사람은 말씀을 보고 들었기에 말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믿게 된 것이다. ‘말씀’이라는 단어는 평범하고 단순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사람의 마음과 고정 관념, 그리고 옛 성품을 변화시켰으며, 온 세상의 낡은 면모를 변화시켰다. 지금까지 이렇게 사역하고 말씀하며 사람을 구원한 분은 오직 오늘날의 하나님밖에 없다. 이로부터 사람은 말씀의 인도 아래에서 살고, 말씀의 양육과 공급으로 살게 되었다. 또한 말씀의 세계에서 살고, 하나님 말씀의 저주와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으며, 더 많은 사람이 말씀의 심판과 형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이러한 말씀과 사역은 다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옛 창조 세계의 원래 모습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말씀으로 온 우주 사람을 인도하고 정복하고 구원하며, 마지막에는 말씀으로 옛 세상을 끝낸다. 이렇게 해야 전체 경륜의 모든 부분이 완성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나라시대는 말씀 시대이다> 중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고 ‘진리의 성령’이 ‘육신’에 실체화되었다. 즉, 모든 진리, 길, 생명이 모두 육신으로 임했고, 하나님의 영이 확실히 땅에 왔으며, 영이 육신으로 왔다. 겉으로 보면 성령으로 잉태된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사역을 통해 영이 육신에 실체화되었고, ‘도’가 ‘육신’ 되었고,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났음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란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너는 오늘날의 말씀이 하나님이고, 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이것이 너의 가장 좋은 간증이다. 이러면 네가 단순히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가고 있는 길이 생명의 도, 진리의 도임을 깨달았기에 진정으로 그에 대해 알게 되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예수가 한 단계 사역을 했지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본질적 의미만 이루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의 영은 육신과 함께하므로 둘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즉, 육신을 입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므로 성육신한 예수가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이라는 증거가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번 단계의 사역은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말의 함의를 이룬 것이다. 또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의 의미와 더 깊게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말까지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그의 말씀은 그와 함께하였으므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그의 말씀의 위력과 권병을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내어 그의 모든 말씀을 보게 한다. 즉, 그의 모든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하는 사역이다. 너는 이런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육신을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말씀, 육신과 도의 관계를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마땅히 해야 할 간증이자 모든 이가 알아야 할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4> 중에서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내 말은 영원불변한 진리이며, 나는 사람의 생명 공급자이자 인류의 유일한 인도자다. 내 말의 가치와 의의는 인류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의 본질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다. 설령 이 세상에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내 말의 가치와 인류에 대한 도움은 그 누구도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말을 거역하고 반박하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오직 하나뿐이다. 시간과 사실이 나를 증거할 것이다. 내 말이 곧 진리, 길, 생명이며, 내가 한 모든 말들은 옳은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실증할 것이다. 나는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실을 알게 할 것이다. 즉, 나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에서 목표를 찾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내 말에 정죄받을 사람들이고, 더욱이 내 구원의 은혜를 잃은 사람들로, 내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너희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숙고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 전편 발췌)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생명의 도는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본질과 생명의 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자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창세 이후 하나님은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는 사역,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사역을 수없이 행하였으며,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숱한 대가를 치렀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생이자 사람을 부활시키는 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매 순간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시시각각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과 생존하는 근본이 되었으며, 또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사람을 소생시켜 모두가 흔들림 없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도록 했다. 사람은 그의 힘과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는 그의 생명력에 의지해 한 세대 한 세대 이어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생명의 힘은 시종일관 변함없이 사람들을 지탱해 주고 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치른 적 없는 대가를 치렀다. 하나님의 생명력은 모든 힘을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힘을 초월할 수 있다. 그의 생명은 영원하고 그의 힘은 비범하다. 그 어떤 피조물도, 그 어떤 적대 세력도 그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의 생명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눈부신 빛으로 반짝인다. 천지가 크게 변해도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생명은 계속 존재한다. 하나님은 만물이 생존하는 원천이자 만물이 의지해 살아가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하늘은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땅 역시 하나님의 생명의 힘을 원천으로 숨 쉬고 있다. 생기를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재를 벗어날 수 없고, 활력을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병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인물이든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

지금 너는 생명을 간절히 원할 수도 있고, 진리를 몹시 얻고 싶을 수도 있다. 어쨌든 너는 하나님을 찾고 싶어 할 것이다. 네가 의지할 수 있고, 네게 영생을 부여하는 하나님을 말이다. 하지만 영생을 얻고 싶다면 먼저 영생이 어디에서 오는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방금 나는 하나님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이고, 하나님만이 생명의 도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이라면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하나님만이 생명의 도라면 하나님 자신이 곧 영생의 도이다. 그렇다면 너는 먼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이 영생의 도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일단 이 두 문제를 나눠 교제해 보도록 하자.

네가 진정으로 영생의 도를 얻고자 하고 또 그것을 갈급하게 찾고 있다면 우선 나의 질문에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마도 너는 “하나님은 당연히 하늘에 계시지요. 설마 당신 집에 계시겠습니까?”라고 대답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은 당연히 만물 가운데 있다거나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다거나 영계에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나는 그 대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 사람 마음속에 있다’는 대답은 완전히 옳은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진정으로 믿는 사람과 거짓으로 믿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과 증오하는 사람,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사람과 도태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일부 사람의 마음속에만 거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칭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대상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대상인 만큼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영생의 도를 보고 들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믿는 사람, 하나님이 칭찬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증오하는 사람, 하나님에 의해 도태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생명의 도를 얻지 못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반대로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영생의 도를 받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대상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 사람의 곁, 영계, 그리고 만물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땅 위에도 있다. 그러므로 말세가 도래함에 따라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도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동시에 사람의 마음속에서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며, 나아가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래야만 인류에게 생명의 도를 전해 줄 수 있고 사람을 생명의 도로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이 땅에 임하여 인간 세상에서 사는 것은 사람이 생명의 도를 얻게 하기 위함이고, 사람이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서 행하는 자신의 경영에 보조를 맞추게 하기 위해 만물 가운데서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이 진리는 시인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늘과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이치만 인정한다면, 너는 영원히 생명도, 진리의 도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곧 생명이고 진리다.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는 공존한다. 진리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생명도 얻지 못한다. 진리로 인도해 주고 붙들어 주고 공급해 주는 일이 없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글귀와 이치, 그리고 죽음뿐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존재하고, 하나님의 진리는 생명과 함께 공존한다. 진리의 근원을 찾지 못한다면 너는 생명의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너에게는 분명 진리가 없을 것이며, 너의 몸뚱이는 상상과 관념으로 가득 찬 육체, 즉 구린내가 진동하는 육체에 불과할 것이다. 명심해라. 책의 글귀는 생명으로 삼을 수 없고, 역사적 기록은 진리로 삼아 섬길 수 없으며, 과거의 규례는 하나님이 현실에서 한 말씀의 실제 기록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땅에 임하여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한 말씀만이 진리이자 생명이며,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현실적인 사역 방식이다. 하나님이 지난 시대에 했던 말씀의 기록을 오늘날에도 고수한다면 너는 고고학자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너에게는 역사ㆍ문화재 전문가라는 호칭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너는 늘 하나님이 과거에 사역할 때 남겨 둔 흔적만 믿고, 하나님이 지난날 인간 세상에서 사역할 때 남겨 둔 그림자만 믿으며, 하나님이 오래전 하나님을 따르던 당시 사람들에게 전해 준 도만 믿을 뿐, 하나님이 현재 사역하는 방향이나 현재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 현재 선포한 진리의 도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매우 비현실적인 공상가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글귀만 고수하고 있다면 너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진 나무와 다름없다. 너는 너무나 고집스럽게 낡은 것을 지키고 너무나 완고하며 너무나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자들은 언젠가 모두 쓰러질 것이다. 그들이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본질은 조금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짜와 가짜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답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네가 진실로 생명의 도를 찾고자 한다면 너는 먼저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와서 생명의 도를 베풀어 주는 사역을 하고 있으며, 또한 말세에 인간 세상에 와서 생명의 도를 베풀어 주고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에 말이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생명이고, 영원하고 영원한 진리의 도이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이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유일한 길이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공급하는 생명의 도를 찾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예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영원히 천국의 대문에 들어설 자격도 없다. 이는 네가 역사(歷史)의 꼭두각시이자 역사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규례와 글귀, 역사의 멍에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영구한 생명의 도를 얻지 못한다. 그들이 얻은 것은 보좌에서 흘러나온 생명수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고여 있던 더러운 물이기 때문이다. 생명수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시체이고 사탄의 노리개이며 지옥의 자식이다. 이런데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 네가 역사(歷史)를 답습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며 현상 유지에 그칠 뿐, 현 상태를 변화시켜 역사를 도태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솟구치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천둥소리처럼 거침없이 나아가거늘, 네가 죽을 때까지 앉아서 요행만을 바라며 기다린다면 어찌 너를 어린양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지키고 있는 하나님을 어찌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누렇게 바랜 지 오래인 네 책의 글귀가 어찌 너를 다른 시대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어찌 찾아 줄 수 있겠으며, 또 어찌 너를 하늘나라로 데려다줄 수 있겠느냐?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그저 잠시 위안을 주는 글귀에 불과하다. 네가 읽는 성경 구절은 인생을 알려 주는 현묘한 이치도 아니고 너를 온전케 하는 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저 네 혀를 충실하게 해 주는 구절일 뿐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너는 반성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 속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단 말이냐? 너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오지 않으면 너 스스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느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느냐? 그렇다면 너에게 권하노니, 이제 꿈에서 깨어나라. 너는 현재 사역을 행하는 이가 누구인지, 사람을 구원하는 말세 사역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도 생명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사람이고, 그리스도가 가져다준 생명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허황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말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이 영원히 혐오하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도에 순종해야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공급을 거부한 채 복받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말세에 그리스도가 온 이유는 그를 진심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역은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사역이며, 새 시대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네가 인정하지 않고 정죄하거나 모독하거나 핍박을 가한다면, 반드시 영원히 불태워질 것이며,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이 그리스도는 성령의 발현이자 하나님의 발현이며,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이다. 그러므로 말세 그리스도가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성령을 모독한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명심해라. 네가 말세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저버린다면 아무도 너 대신 그 대가를 치러 주지 못할 것이다. 그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고, 나아가 만회하고자 해도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대적하고 저버린 이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느냐? 너는 작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권하노니, 진리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말고, 사실을 외면한 채 함부로 말하지도 말라. 너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너를 소생시켜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할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노아의 방주]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하나님의 거룩함(2)

오늘은 찬양 한 곡을 불러 보거라. 너희가 좋아하고 평소 자주 부르던 곡을 찾아보아라. (하나님 말씀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부르겠습니다.)

1.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이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느끼고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추측도 없고 기만도 간교도 없다. ‘사랑’에는 거리도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다면 기만도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고, 배반도 거역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무엇을 얻고자, 얼마큼 얻고자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2.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이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느끼고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추측도 없고 기만도 간교도 없다. ‘사랑’에는 거리도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다면 기꺼이 바치고, 고난을 감내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마음을 합할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너의 가정과 앞날, 청춘과 결혼까지도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이고 배반이다!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찬양을 참 잘 선택했구나. 너희는 이 찬양을 좋아하느냐? (네.) 이 찬양을 부르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고 느껴지느냐? (아직 거기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찬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부분이냐?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기만도 없고, 거래도 없으며, 간교도 선택도 없고, 어떠한 불순물도 없다.”라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많은 불순물이 있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부분, 그리고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저는 확실히 아직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네 사랑은 어떤 수준에 있느냐?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느냐?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너의 분량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말해 보아라. 어느 정도에 도달했느냐? 기만이 있느냐? 원망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해 요구나 욕망이 있느냐? (그런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불순물은 어떤 상황에서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마련하신 환경이 저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나 저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런 패괴된 성품이 드러납니다.) 대만의 형제자매들, 너희도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느냐? 너희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 볼 수 있느냐? 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겠느냐? (저도 이 찬양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임을 진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이런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참된 사랑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서는 노력하며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더해 주신 힘과 기도로 하나님과 협력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임하거나 드러나 저 자신에게 앞날이나 운명, 종착지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특히 연약해집니다. 한동안 체험한 후 기도를 통해 이런 상태들이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자주 이 부분에서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말하는 ‘운명과 앞날’은 도대체 무엇이냐? 가리키는 것이 있느냐? 하나의 그림이냐? 아니면 상상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가 직접 그 앞날과 운명이란 것을 보기라도 했느냐?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냐? 너희 모두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마음속으로 염려하는 앞날과 운명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입니다. 또 저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받고, 합격된 본분을 이행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늘 드러나니, 하나님의 기준과 차이가 매우 크다는 생각이 들고, 제게 앞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말해 보아라.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그것은 자신의 불순물이 없고, 앞날과 운명의 속박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면서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이야말로 티 없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저 자신과 대조해 보면, 하나님을 믿어 온 이 여러 해 동안 겉으로는 얼마간 헌신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드러날 때는 이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는 생각에 소극적인 상태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종착지, 앞날, 운명을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희는 이 찬양을 자주 부르는 모양이구나. 너희가 이 찬양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실제 체험과도 연결을 좀 시키고 있지만,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서 언급된 매 구절의 말씀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원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앞날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가정을 내려놓으려 하는 것,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또 어떤 사람은 기만도, 원망도, 거역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또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했겠느냐? 사람은 이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이런 사랑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겠느냐? 사람이 보기에도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기에 이런 말씀들이 사람에게는 다 생소한 것이다. 사람은 이런 세상에 태어나 패괴된 성품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있거나 혹은 이런 사랑을 갖추어 바라는 것이 없고, 무엇을 얻고자 하지도 않고, 기꺼이 바치고 고난을 감내할 수 있다면,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랑을 갖춘 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겠느냐? 완벽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진공 속에서 살면 모를까, 이 세상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체험하면서 이런 말씀과 자신을 대조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억제했고, 심지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저버리면서 고난을 받고 관념과 패역, 욕망과 요구를 내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은 어찌 된 영문이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을 준 것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즉시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사람에게 얼마 동안의 시간 내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더냐?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이 있느냐? 이 말씀에 그런 부분은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을 뿐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즉시,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랑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늘 이런 말씀을 읽는다고 조금씩 사랑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먼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없으려면?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거래가 없으려면? 이것도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교가 없으려면? 사랑에 선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모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 아니더냐? 여기에는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언급하거나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간격이나 거리가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의심하더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알고 있다. 진실로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기만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완벽하게 말씀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완벽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 중에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이 있더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느냐?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 베풀거나 바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것은 간단한 말에 불과하며, 본질적인 면은 없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말씀은 하나님의 한 가지 측면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어떤 측면의 본질이겠느냐? 지난번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그 화제는 이전에 사람이 자주 말했던 것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 그 단어가 자주 제기되지만 사람은 그것에 대해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 단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오긴 했지만, 인류가 그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그 단어는 무엇이겠느냐?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이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교통했던 화제다. 지난번에는 일부만 교통했다. 지난번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측면의 본질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어떤 인식들이 새롭다고 생각되느냐? 어떤 인식과 말씀들이 너희로 하여금 너희가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거룩함과 내가 교통한 하나님의 거룩함이 구별되거나 다르다고 느끼게 하였느냐? 여기에 대한 인상이 있느냐?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는 불순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룩함에 대한 한 측면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도 거룩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진노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유일무이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전에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같지 않고,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긍정적인 것이고 원칙이 있다고,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인해 발하게 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보셨기에 그런 진노를 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이는 피조물이 갖추지 못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류에게도 긍휼과 비슷한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들이 있지만 안에는 모두 불순물이나 목적이 있고, 심지어 어떤 경우, 긍휼이라는 것은 모두 가상이고 공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인류에 대한 구원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런 긍휼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 아름다운 종착지와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받는 길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본질에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노로 한 성을 멸하려고 하셨다가도 긍휼의 본질로 인해 또 언제든지 사람의 회개로 긍휼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받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 이 방면에 인식이 있구나.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화제는 ‘거룩함’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다 조금씩은 들어 보았고, 또 조금씩은 알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흔히 하나님의 공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같이 놓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는 모두에게 생소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함의 함의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내는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하나님이 나타낸 것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지만, 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조금 모호하고 헷갈린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거나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너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이 알고 있는 거룩함에는 하나님의 어떤 나타냄이나 소유, 어떠함들이 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본 것은, 사람은 늘 자주 쓰는 단어나 자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습관이 되어 관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고 알아보면, 그것의 실제 의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예로 들자면,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도대체 하나님의 어느 부분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거룩함’이란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적절하게 나타나는지(원문: 兌現)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속이 멍해 사람은 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여길 뿐, 하나님이 어떻게 거룩한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이 화제를 교통하는 것은 바로 ‘거룩함’이란 이 단어를 하나님에게서 구현시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실제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늘 함부로 쓰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고, 또한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한지 부정확한지도 모른 채, 아무튼 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말하니 너도나도 덩달아 입버릇처럼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단어를 더럽히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단어가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사람은 기본적으로 ‘거룩함’이란 단어가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고, 순결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방금 부른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과 같이 어떤 사람은 ‘거룩함’을 ‘사랑’과 연결시키는데, 이는 틀리지 않았다. 그것도 일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지닌 본질의 일부지,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관념적으로 이 글자를 볼 때 늘 본인이 순결하거나 깨끗하다고 여기는 것, 혹은 소위 말해서 불결하지 않고 정결한 것들을 연상한다. 일례로 연꽃이 정결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은 ‘거룩함’이란 단어를 연꽃과 연결시킨다. 또 지어낸 사랑 이야기나 꾸며 낸 위대한 인물들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성경이나 영적 서적에 기록된 성도나 사도와 같은 인물, 또는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자들의 영적 체험을 거룩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사람의 상상이자 관념이다. 사람은 왜 그런 관념을 갖고 있겠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고 사악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접하고, 체험한 것이 전부 사탄의 사악함과 사탄의 패괴,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 간의 암투와 싸움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고, 말씀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나타내도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본질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는 참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사람은 더러움 속에서, 패괴 속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으므로 빛을 보지 못한다. 또한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긍정적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래서 거룩함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괴된 인류 가운데 거룩한 것이나 거룩한 사람이 존재하겠느냐? 오직 하나님의 본질만이 거룩하므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번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질에 대해 일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일부 내용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는 데 어느 정도 깨우침을 줄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부족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알게 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함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에는 부족하다. 더욱이 거룩함의 참뜻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나타난다는 내용을 깨닫게 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번에 우리는 세 가지를 나누었다. 이제 네 번째 주제로 넘어갈 차례이다. 성경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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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예수의 비유, 계명

1. 산상수훈

복에 대하여(마 5:3~12)

빛과 소금에 대하여(마 5:13~16)

율법에 대하여(마 5:17~20)

노에 대하여(마 5:21~26)

간음에 대하여(마 5:27~30)

이혼에 대하여(마 5:31~32)

맹세에 대하여(마 5:33~37)

보복에 대하여(마 5:38~42)

원수 사랑에 대하여(마 5:43~48)

구제에 대하여(마 6:1~4)

기도에 대하여(마 6:5~8)

2. 예수의 비유

씨 뿌리는 비유(마 13:1~9)

가라지 비유(마 13:24~30)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누룩 비유(마 13:33)

가라지 비유 설명(마 13:36~43)

보화를 감추는 비유(마 13:44)

진주를 찾는 비유(마 13:45~46)

그물을 치는 비유(마 13:47~50)

3. 계명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우선 ‘산상수훈’에 포함된 항목들을 보자. 이 내용들은 모두 무엇과 관련 있느냐? 확실히 이 내용들은 율법시대의 규례보다 훨씬 수준 높고 구체적이며 사람의 생활과 더 밀착된 것이다. 지금 말로 하자면, 사람의 실제 실천에 더 가까운 것이다.

산상수훈, 예수의 비유, 계명

산상수훈, 예수의 비유, 계명

확장열람: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다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복’에 대한 인식, ‘율법’에 대한 인식, ‘노’에 대한 정의, 간음한 자를 대하는 것, 사람이 이혼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이혼에 대한 언급과 규정, 맹세, 보복, 원수 사랑, 구제 등에 대한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실천해야 하는 모든 면과 관련된다. 일부 내용은 지금 시대에 가져와도 적용할 수 있지만, 현재 사람에 대한 요구와 비교하면 다소 얕은 수준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접하게 되는 비교적 기초적인 진리인 것이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사람의 생명 성품과 관련된 사역에 착수하였지만 이는 율법이 기반이 된 사역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규정이나 규제는 진리와 관계가 없느냐? 물론 관계있다! 이전의 규례든 원칙이든 아니면 은혜시대의 수훈이든 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과 관련 있고 당연히 다 진리와 연관된다. 하나님이 무엇을 선포하든, 어떤 방식과 언어로 선포하든, 그 기초와 근원, 그리고 출발점은 모두 그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비록 현재 시각으로 볼 때 다소 깊이가 얕더라도 진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생명 성품이 변화하는 데에 없어서 안 되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훈 중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조항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어떤 조항이든 다 진리이다. 어떤 조항이든 모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사람됨의 원칙과 범위로,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당시 사람의 생명이 이 정도만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사람의 죄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단지 이 정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정도 범위의 깊지 않은 교훈을 통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땅히 어떤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과 범위 안에서 일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는 것인지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는 당시 사람들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살던 사람들로선 이러한 도를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예수가 전한 도 역시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어서 ‘예수의 비유’에 대한 각 내용을 보자.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로, 씨 뿌리는 행위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가라지의 비유이다. 농작물을 심어 본 자나 성인이라면 가라지가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세 번째는 겨자씨의 비유이다. 겨자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보도록 해라. 네 번째는 누룩의 비유이다. 많은 사람이 누룩은 일상생활에서 발효에 쓰인다는 사실을 안다. 그 아래의 여섯 번째는 보화를 감추는 비유이고, 일곱 번째는 진주를 찾는 비유, 여덟 번째는 그물을 치는 비유이다. 이 모든 비유의 소재는 다 사람의 생활에서 취한 것이며, 모두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사람에게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정상인이 되어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생활상의 언어와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과 소통하며,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장면이다. 사람들 가운데 성육신하여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겪은 사람의 생활에 대한 일련의 체험들은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교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인자의 인성 경험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그는 사람에게 진리와 하나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할 때, 위의 몇 가지 비유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알려 주었다. 이러한 비유는 다 사람의 생활과 관련 있고, 이와 동떨어진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예수는 사람과 생활하면서 농부가 씨 뿌리는 모습을 보았고, 가라지와 누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사람이 보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에 보화를 감추는 비유와 보물을 찾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평소 고기 잡는 사람들이 그물을 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류의 생활과 관련된 행위들을 예수가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다. 그는 모든 정상인과 똑같이 하루 세끼 먹으며 일하고 쉬는 인류의 삶을 체험했으며, 타인의 생활도 직접 목격하였다. 이 모든 것을 친히 경험하고 목격하며 예수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더 안락하고 자유롭게 사는 법 따위가 아니었다. 인류의 실제 생활을 경험하며 예수는 삶의 고단함을 보았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류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며 죄 가운데서 힘겹고 비참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친히 인류의 생활을 경험한 동시에, 패괴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또한, 죄 가운데서 생활하는 인류가 사탄과 죄악에 의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받는 참혹한 상황을 보고 체험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것들을 신성으로 본 것이냐, 아니면 인성으로 본 것이냐? 예수의 인성은 매우 실제적으로 존재했었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본질, 즉 신성으로도 보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자신, 예수가 직접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본 예수는, 그때 성육신으로 담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육신에서 앞으로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그가 직면할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서 무기력하고 율법 아래에서 불쌍히 살며 힘없이 발버둥 치는 인류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아파 왔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마음은 더 절박해졌다.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든, 자신이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게 되든지 간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담당할 사명이 무엇인지 갈수록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어서 빨리 담당하고자 하는 사역, 즉 사람의 모든 죄를 지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하는 사역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면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고 하나님도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더는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쳐 희생하고 싶었으며, 또한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게다가 하루빨리 그 사역을 완성하고 싶었다. 인류 생활의 참상을 본 그는 1분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더 빨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당할 극심한 고통과 수모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자신을 바침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새 사역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며, 죄 속에 살던 인류의 삶과 처지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는 신념뿐이었다. 그의 신념과 그가 하고자 한 일은 다 인류를 구원하는 사업과 관련이 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다음 단계의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의 마음이었다.

산상수훈, 예수의 비유, 계명

산상수훈, 예수의 비유, 계명

그는 육신에서 사는 성육신 하나님으로서, 정상 인성이 있고, 정상인이 갖고 있는 감정과 이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류의 삶을 보았을 때, 그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가르쳐 주는 것과 사람이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내거나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그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사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인류의 삶을 목격하고 체험한 예수는 인류가 죄 가운데 헤매는 삶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아주 강렬한 소망이 생겨났다. 이 소망을 위해, 그는 자신이 하루빨리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할 때 죄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졌던 생각이다. 인류에 대한 성육신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과 보여진 성품은 평범한 사람도 갖추고 있는 것이냐?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환경에서 살면 무엇을 보겠느냐?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이 모든 것에 맞닥뜨리면,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겠느냐? 분명 그러지 못한다! 비록 성육신 하나님이 겉으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고, 사람의 지식을 배우고 사람의 언어를 쓰며, 심지어 사람의 방식과 화법을 빌려 그의 뜻을 표현할 때가 있을지라도, 그가 인류를 대하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패괴된 인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그는 패괴된 인류라면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위치와 차원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육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생각과 인성이 나타내는 것 역시 진리인 것이다. 패괴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육신이 선포하는 것은 다 진리의 공급이자 생명의 공급이고, 이는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공급이다. 패괴된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관련된 몇몇 사람만을 마음에 수용할 수 있고,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는 이도 단지 몇몇뿐이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자기 집의 아이들과 배우자, 부모만을 생각한다. 비교적 ‘넓은 사랑’을 가진 사람도 고작 어느 친척이나 친한 친구를 생각할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이를 떠올릴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의 위치와 차원에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패괴된 인류와 완전히 다르다. 그 육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보잘것없어 보여도, 심지어 사람의 멸시를 당해도, 그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태도는 그 어떤 사람도 갖출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치에서, 창조주의 차원에서 인류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마음으로 인류를 대한다. 그는 절대 평범한 사람의 차원에서, 패괴된 사람의 관점으로 인류를 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의 안목으로, 사람의 지식과 규칙, 학설 등을 평가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이런 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고 패괴된 인류가 이를 수 있는 범주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볼 때는 하나님의 시각과 본질, 소유와 어떠함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이 범주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패괴된 인류의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 차이는 각자의 본질로 말미암아 결정된 것이고, 본질의 차이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차원을 결정한다. 너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선포와 발현을 보지 못했느냐? 예수가 행하고 말씀한 것들은 다 그의 직분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련이 있으며, 모두 하나님 본질의 선포와 발현이다. 설사 그에게서 일부 인성적인 면이 보여진다 할지라도, 그의 신적 본질과 발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인성적인 면이 정말 인성의 발현이냐? 패괴된 인류와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인성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다. 그가 진짜 패괴된 인류 중의 평범한 일원이라면, 하나님의 위치에서 인류의 죄악된 삶을 대하겠느냐? 단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이다. 패괴된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 살고 있어서 죄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다. 마치 돼지가 진흙탕 속에서 살아도 불편함을 전혀 못 느끼는 것과 같다. 돼지는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잘 먹고 편히 잔다. 사람이 돼지우리를 깨끗이 청소하면, 돼지는 오히려 불편해하며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는 또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매우 자유롭게 살 것이다. 돼지 자체가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때, 돼지는 아무리 깨끗하게 씻겨도 좋은 줄을 모르는 더러운 동물이라 방 안에 두고 기르지 않는다. 사람이 돼지를 보고 대할 때의 느낌과 돼지가 자신에게 가지는 느낌은 영원히 같을 수 없다. 그것은 사람과 돼지가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육신한 인자와 패괴된 사람 역시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만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류와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육신이 받은 고난은 어떤 것일까?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자가 있을까? 어떤 이는 하나님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의 본질을 몰라 항상 사람처럼 대해 하나님을 서글프고 억울하게 만들었으니 그 고통이 실로 너무 크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은 무고하고 죄가 없음에도 사람과 똑같이 고난받고, 사람과 함께 박해와 비방, 수모를 당하며, 아울러 그를 따르는 자들의 오해와 패역도 참아 내야 했으니 그 고통은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한다.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너희가 말하는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진정한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에게는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진정한 고통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게 무엇이 진정한 고통일까?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는 고통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마치 아주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기간에 인류에게 본체를 나타내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지 못하고, 자신을 낮춰 보잘것없는 육신에 은밀히 거하니 매우 괴로우리라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선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심지어 종종 이를 소소하게 찬미하기도 한다. 사실상,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느끼는 고통과 다르고 거리가 멀다. 너희에게 사실을 말하겠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 육신이든, 하나님께 있어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성육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받은 고통을 말해 보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평범한 정상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사람 가운데서 함께 생활한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의 생존 방식, 법칙, 이념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는 그러한 생존의 방식과 법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혐오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왜 혐오할까? 인류의 생존 방식, 법칙은 어떤 것이고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느냐? 무엇을 근거로 삼았느냐? 인류의 생존 방식, 생존 법칙 등등 모든 것은 사탄의 논리와 지식, 철학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들이다. 이러한 생존 법칙으로 살고 있는 인류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뿐, 인간성도, 진리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의 본질은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과 정반대이다. 그의 본질에는 공의, 진리, 거룩함 등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제가 충만하다. 이러한 본질을 갖춘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생활하는데, 그 심정은 어떠하겠느냐?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겠느냐? 고통스러운 심정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거나 느낄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가 보고 듣고 접하고 체험하며 대면한 것들은 모두 인류의 패괴와 사악함, 진리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이 그의 고통의 근원이다. 즉, 그와 패괴된 인류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패괴가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였을 때, 그와 공통된 언어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겠느냐? 인류 속에서는 찾지 못했다. 인류 속에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고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 같으냐? 게다가 사람이 말하는 것, 좋아하는 것,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모두 죄와 사악한 시류와 관련된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대할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겠느냐? 이러한 일을 대하는데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느냐?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와 함께 생활하는 자들은 패역과 사악으로 가득 찬 인류인데, 그의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이러한 고통이 대체 얼마나 큰지, 누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느냐? 누가 그것에 신경을 썼느냐? 누가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냉대와 무감각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늘 그리스도의 처지를 동정한다. 성경에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이 있어 사람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것이 하나님이 받은 가장 큰 고통이자 그리스도가 받은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사실로 볼 때, 정말 그러하냐? 하나님은 이를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육신이 받은 고통 때문에 불평이나 억울함을 토로한 적이 없다. 또한, 사람에게 무엇을 보답하고 갚으라고 한 적도 없다. 사람의 모든 것, 즉 패괴된 인류의 삶과 사악한 모습, 사탄에게 통제받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모습을 목도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이 모든 죄악을 용납할 수 없었고 날로 인류를 혐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참아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은 크나큰 고통인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 하나님의 희로애락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발현될 수 없었고, 게다가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위로해 보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그는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계속해서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것에 대해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류의 사악과 패괴와 죄악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고 증오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육신은 끊임없이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것들을 너희는 보았느냐? 분명 너희 중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복음간증 영화<막차에 오르다> 어느 목사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 진실한 이야기

영상 소개:

천펑(陳鹏)은 열심히 교회를 이끌고 신도들을 보살피고, 열정적으로 주의 일을 해 온 가정 교회의 목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교회는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소심해지고 나약해지며 예배에 오는 것조차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목사인 본인도 영적으로 막막하고 메말라갔으며, 주님의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설교할 주제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교회의 부흥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힘들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오랜만에 옛 동역자가 찾아와 예배 참석을 권한다. 그곳에서 천펑은 교회가 황폐한 원인을 찾게 되고, 생수의 공급원을 찾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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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영화<천국의 꿈>심판을 받아들여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다

마태복음 24장 23~24절 설교: 어떻게 이단을 분별할 것인가

오늘날, 여러 재난이 임하면서 주님 재림과 관련한 성경 속 예언들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주님이 벌써 오지 않으셨을까 하는 예감에 주님을 찾고 싶어 하지만, 이단에게 미혹될까 두려워 대담하게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단을 경계하는 데만 신경 쓰다 보면 정말로 재림한 주님을 문전박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련한 처녀처럼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 채 버려지고 도태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정말 자질과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진리를 구하며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장 알아야 할 것은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이단에 속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3~24절 설교: 어떻게 이단을 분별할 것인가

마태복음 24장 23~24절 설교: 어떻게 이단을 분별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3~24)이란 말씀 때문에 누군가 주님이 이미 돌아오셨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도 구하거나 알아보지 않고 여전히 종교계를 따르며 ‘주님이 육신을 입고 돌아오신다고 증거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다’라는 관념을 고집합니다. 이러면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 여러 차례 예언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주님이 육신을 입고 돌아오신다고 증거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다’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큰 죄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 우리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어선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 음성 듣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 25:6) 그리고 계시록에도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7) 깨어서 기다리고 하나님 음성 듣기를 중요히 여기는 것,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누군가 주님이 돌아왔다고 증거하면 사람은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 적극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진리에 대해 교제해 봅시다.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법 1: 그리스도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인정한다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려면, 우리는 그가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다.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혹은 참도인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서문> 중에서)『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자들은 언젠가 모두 쓰러질 것이다. 그들이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본질은 조금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짜와 가짜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답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줄 수 있다> 중에서)

오직 성육신하신 하나님만이 그리스도라 불릴 수 있다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한 존재이자,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하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지혜가 모두 육신 안에 실체화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진리의 화신입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선포해 사람을 공급하고 목양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속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바로 이러하셨습니다. 어디서든 진리를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회개의 도를 가져다주셨고, 사람들을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법, 용서하는 법을 알도록 일련의 요구를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과 말씀, 그리고 인류를 향한 그분의 자비와 긍휼은 그 어떤 사람도 해낼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신분을 온전히 대표해 줍니다.

하지만 거짓 그리스도의 본질은 악령이자 마귀로, 진리라곤 전혀 없으니 당연히 진리를 선포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 교만하고 황당무계한 인간들로, 사람들이 성경의 지식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런 심리를 이용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여러 기이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해대며 사람을 미혹시킵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성품이 변화되지도 하나님을 잘 알게 되지도 않을뿐더러, 영이 어두워지고 가라앉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전 인류가 구하고 알아보도록 공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뒤에서 몰래 분별력 없는 사람들을 미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본질을 가지고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해야 합니다. 신성의 본질을 가진 그리스도만이 진리를 선포해 인류를 공급하고 구원할 수 있는데, 이는 신성의 본질이 없는 인간은 아무리 지식과 재주가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악령과 마귀 역시 당연히 진리를 선포할 수 없고,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법 2: 늘 새로운 사역을 하시는 하나님은 중복 사역을 반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하나님으로, 사역을 반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점을 가지고 진짜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날 만약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권능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칭 돌아온 예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악령이 가장한 것이고, 악령이 예수를 모방하여 행한 것이다. 이 점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중복 사역을 하지 않는다. 예수의 그 단계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기에 그 뒤로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사역을 하지 않는다. … 만약 하나님이 예수가 행한 것과 똑같이 말세에도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중복된다. 그러면 예수의 사역은 의의도, 가치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시대에 한 단계 사역만 행한다.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마칠 때마다 악령이 곧이어 모방하고, 사탄이 하나님을 뒤따라가면 하나님은 다시 방식을 바꾼다. 너희는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마치면 악령이 이를 모방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서 볼 수 있다시피, 하나님은 늘 새로우신 분으로 중복 사역을 반복하지 않으십니다. 오셔서 사역할 때마다 하나님은 늘 새 시대를 여시고 옛 시대를 끝내시며, 더 새롭고 더 높은 사역을 가져오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율법시대를 완성하시고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셔서 사람들의 삶을 이끄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과거의 사역을 반복하지 않고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여셔서, 인류를 구속하고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런 사역들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고, 새 시대를 열고 옛 시대를 끝낼 수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하신 사역의 뒤를 따라가며 하나님의 어조와 말씀을 흉내 내고, 하나님의 과거 사역을 모방해 약간의 이적과 기사를 보여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사람을 속일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거짓 그리스도에게는 권병이 없기에, 그들이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거나,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등의 이적은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말세에 다시 오신 하나님은 절대로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사역을 모방해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는 등 간단한 이적과 기사를 보이며 사람을 미혹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분명 악령이 외식하는 것이고, 거짓 그리스도로, 이단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여기까지 교제를 통해, 우리 모두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생명의 본질이 있고, 진리를 선포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진리를 좋아하고 갈망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에 이끌려 정복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로 하나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고,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같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바로 다시 오신 메시야임을 알아보고 앞다투어 주님을 따른 것처럼 말입니다. 말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사역을 하시고, 인류를 구원하는 모든 진리를 선포하여 하나님의 6천 년 경영 사역의 비밀을 전부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탄 본성과 본질을 폭로하여, 사람이 자신의 패괴된 진짜 모습을 보고, 성품 변화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실천해 정상적인 인성을 살아낼 수 있는지 등의 내용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입니다. 이는 성경의 예언대로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말씀집은 진리를 사랑하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구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현현을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아보고는 그분이 바로 말세에 다시 오신 예수님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앞다투어 어린양의 발자취를 좇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돌아왔습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 맺은 결실이고, 이사야서 2장 2절에 나온 예언 대로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주님을 맞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음성 듣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선 얼마든지 구하고 알아보며, 진리에 근거해 분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단의 미혹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 경계만 하고 미처 구하고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해 말세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짓 아닐까요?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의 말세 구원을 영원히 놓치고 말 것입니다!

추천 영상: 말세에 참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법 <진짜는 가짜일 수 없다>

말씀 찬양 CCM <항상 하나님 알기를 추구한 베드로>(가사 버전)

영상 소개
1

베드로가 예수 처음 따랐을 땐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로만 보았을 뿐 그리스도론 못 봄이라

하나님의 말씀 체험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하나님을 위해 고난 겪어도 그 사역 몰랐음이라

체험 속에서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행사와 하나님 사랑스러움과 어떠하심 봄이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고 사람이 대신할 수 없음을 보았음이라

예수 말씀과 행사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 지혜 보고

예수 말씀과 행사 통해 신성의 사역 보았음이라

2

체험 속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알 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행사 보며 새로운 것 발견했으니

예수에게 실제 하나님의 모습 많았고

그의 말씀과 사역과 행사 교회 목양에 있어서도 일반인과 달랐음이라

예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베드로 예수가 곧 못 박히실 때 예수를 조금 알았기에

예수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고

평생 한결같이 예수에게 충성할 수 있었음이라

예수 말씀과 행사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 지혜 보고

예수 말씀과 행사 통해 신성의 사역 보았음이라

예수 말씀과 행사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 지혜 보고

예수 말씀과 행사 통해 신성의 사역 보았음이라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더 보기: 말씀 찬양 CCM <전능하신 하나님, 책을 펼치셨네>(가사 버전)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수 있으리

영상 소개

1

악에서 떠나려면 하나님을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리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그에 대해 알아야 하리

하나님을 알려면 그의 말씀을 실천하고 심판과 징계를 체험해야 하리

2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려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마주해야 하리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배치해 달라고 간구하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많은 관계가 있다네

3

하나님의 말씀과 마주하려면 정직한 마음이 필요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필요하네

진정한 피조물이 되려는 소망이 필요하고

고난을 견디고 악에서 떠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많은 관계가 있다네

4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너의 존재가 가치 있어지리라

너의 마음은 정결해지고 너의 인생은 의미 있고 밝게 빛나리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많은 관계가 있다네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를 경외하고 그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수 있네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출처하나님 나라

 

[전능신교]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 관심이 있습니까

주안의 형제자매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저는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 관심을 두고 알아보는 과정에서 진심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온 교계의 기독교 신자가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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